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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앙 (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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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앙은 신나라 말 농민 반란 시기 녹림군에 가담하여 경시제 유현 옹립에 기여하고 위위대장군과 회양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경시제 정권 하에서 왕광과 횡포를 부리다 하동 수비에 실패하고 경시제를 암살하여 적미군에 투항했다. 이후 적미군이 경시제를 장사왕으로 봉했으나 장앙은 사록을 시켜 경시제를 교살했다. 그의 행적은 후한 건국 과정의 권력 투쟁과 변절의 양상을 보여준다.

2. 초기 활동 및 녹림군 가담

신나라 말기 기근으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장앙녹림군에 가담했다. 지황 3년(22년) 역병으로 녹림군이 흩어졌을 때, 왕상, 성단과 함께 하강병(下江兵)을 이끌었다.

지황 4년(23년) 1월, 하강병과 층릉군 연합군은 비수에서 신나라의 견부와 양구사를 격파하고 참수했다.

그 후, 녹림군은 다시 합류했고, 유연유현 중 누구를 황제로 옹립할 것인지 논의했다. 남양의 사대부와 왕상은 유연을, 그 외의 여러 장수들은 유현을 지지했는데, 장앙은 유현파에 가담했다. 결국 유연이 유현에게 양보했고, 장앙은 검을 뽑아 땅을 베며 "이후로는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경시 원년(23년) 2월, 유현은 경시제로 즉위했고, 장앙은 위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2. 1. 하강병(下江兵)의 지도자

신나라 말기 기근으로 인해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장앙왕상, 성단과 함께 하강병(下江兵)을 이끌었다. 하강병은 녹림군의 일파로, 남군 남구에서 활동했다.[2]

지황 3년(22년), 역병으로 녹림군이 흩어졌을 때 장앙은 왕상, 성단과 함께 하강병이라는 이름으로 남군의 남구로 들어갔고, 왕상이 그 지도자를 맡았다.[2] 하강병이 신나라에 격파되었을 때 왕상, 성단과 함께 패잔병을 수습했다.[3]

같은 해 하강병이 남양군 의추취에 주둔하고 있을 때, 남양군 용릉현에서 일어난 용릉병이 녹림군 중 신시병·평림병과 연합해 소장안에서 크게 패했다. 용릉병의 지도자 유인은 동생 유수를 보내 협상을 시도했고, 장앙은 성단과 함께 왕상을 추대해 용릉병에게 보냈다. 용릉병에 협조하기로 결단한 왕상이 돌아오자 처음에는 성단과 함께 반대했으나, 결국 왕상의 설득을 받아들여 용릉병과 함께했다.[3]

2. 2. 용릉병(舂陵兵)과의 연합

지황 3년(22년), 역병으로 녹림군이 흩어졌을 때 장앙은 왕상, 성단과 함께 남구(藍口)에서 하강병(下江兵)을 이끌었다.[2] 하강병은 신나라에 격파된 후, 왕상, 성단과 함께 패잔병을 수습했다.[3]

그해 하강병이 남양군 의추취(宜秋聚)에 주둔하고 있을 때, 용릉병(舂陵兵)의 지도자 유인이 동생 유수를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장앙은 성단과 함께 왕상을 추대해 용릉병에게 보냈고, 왕상이 용릉병과의 협력을 결정하고 돌아오자 처음에는 성단과 함께 반대했으나, 결국 왕상의 설득으로 용릉병과 연합했다. 하강병이 합세하자 신시병(新市兵)과 평림병(平林兵)도 합류하여, 함께 신나라 군대를 육수(淯水)와 비수(沘水) 사이에서 무찌르고 대장 전수대부(前隊大夫) 진부와 속정(屬正) 양구사(梁丘賜)를 베었다.[3]

3. 경시제(更始帝) 옹립과 현한(玄漢) 건국

신나라 말기 기근으로 녹림군이 일어났는데, 지황 3년(22년) 역병으로 흩어졌다. 이때 장앙은 왕상, 성단과 함께 하강병(下江兵)이라는 이름으로 남군의 남구(藍口)로 들어갔고, 왕상이 지도자가 되었다.[2] 하강병은 신나라에 격파되었고, 장앙은 왕상, 성단과 함께 패잔병을 수습했다.[3]

같은 해 하강병이 남양군 의추취에 주둔하고 있을 때, 남양군 용릉현에서 일어난 용릉병이 녹림군 중 신시병·평림병과 연합하고자 유수를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장앙은 성단과 함께 처음에는 용릉병과의 연합에 반대했으나, 왕상의 설득으로 결국 용릉병과 함께하게 되었다. 하강병이 합세하자 떠나려던 신시병과 평림병도 남아 함께 신군을 무찌르고 대장 전수대부 진부와 속정 양구사를 베었다.[3]

3. 1. 유현(劉玄) 지지

녹림군에서 황제를 추대할 때 유현유인으로 의견이 나뉘었는데, 장앙은 평림병·신시병 쪽에 가담해 유현을 지지했다.[3][4] 유인이 뜻을 꺾고 유현을 지지하기로 결정하자, 장앙은 칼을 뽑아 땅을 베고 더 이상 논의하지 말 것을 주장하며 회의를 끝냈다.[3][4] 경시 원년(23년) 음력 2월, 유현이 황제로 추대되어 경시제가 되었다.

3. 2. 위위(衛尉)대장군 임명 및 회양왕(淮陽王) 봉작

유현이 경시 원년(23년) 2월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장앙은 위위대장군에 임명되었다.[5] 이후 경시 2년(24년), 신나라가 멸망하고 현한이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제후왕을 봉할 때 장앙은 회양왕이 되었다.[5]

4. 경시제 정권 하에서의 활동과 반란

신나라 말기 기근으로 인해 일어난 농민 반란군인 녹림군이 지황 3년(22년) 역병으로 흩어졌을 때, 왕상, 성단과 함께 하강병(下江兵)이라는 이름으로 나뉘어 남군의 남구(藍口)로 들어갔고, 왕상이 그 지도자를 맡았다.[2] 하강병이 신나라에 격파됐을 때 왕상, 성단과 함께 패잔병을 수습했다.[3]

이해 하강병이 남양군 의추취에 주둔하고 있을 때, 남양군 용릉현에서 일어난 용릉병이 녹림군 중 신시병·평림병과 연합해 소장안에서 크게 패했다. 용릉병의 지도자 유인은 동생 유수를 보내 협상을 시도했고, 장앙은 성단과 함께 왕상을 추대해 용릉병에게 보냈다. 용릉병과 협력하기로 한 왕상이 돌아오자, 처음에는 성단과 함께 반대했으나 결국 왕상의 설득을 받아들여 용릉병과 함께했다. 하강병이 합세하자 신시병과 평림병도 그대로 남아, 함께 신군을 육수와 비수 사이에서 무찌르고 대장 전수대부 진부와 속정 양구사를 베었다.[3]

23년, 녹림군이 황제를 추대할 때 유인과 평림병의 경시장군 유현으로 의견이 나뉘었는데, 대장 왕상이 유인을 지지함에도 장앙은 평림병·신시병 쪽에 가담해 유현을 지지했다. 유인이 자기 뜻을 꺾고 유현을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모두 받아들이자, 장앙은 칼을 뽑아 땅을 찍고 더 논의하지 말 것을 주장하며 회의를 끝냈다.[3][4] 음력 2월, 유현이 황제로 추대되어 경시제가 되고 삼공구경을 두었는데, 당시에는 기록이 없으나 나중에 위위대장군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5] 이때 위위가 된 것으로 보인다.

24년, 신나라가 멸망하고 현한이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제후왕을 봉했는데, 장앙은 이때 회양왕이 되었다.[5] 장군 요위(徭偉)와 함께 주유가 평정한 회양성을 진무하러 갔는데, 요위가 반역해 쫓겨났고 주유의 교위 잠팽이 이를 수습했다.[6]

4. 1. 왕광(王匡)과의 횡포

경시제 즉위 후, 장앙은 왕광과 함께 삼보(三輔) 지역에서 횡포를 부려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5] 이는 경시제 정권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었다.

4. 2. 하동(河東) 수비 실패

왕광, 성단과 함께 하동을 수비했으나, 유수의 부하 등우에게 격파되었다.[5]

4. 3. 경시제 암살

적미군장안을 위협하자, 장앙은 다른 장수들과 함께 남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경시제가 거부했다.[5] 이에 불만을 품은 장앙은 요담, 호은, 신도건, 외효 등과 함께 경시제를 겁박하려 했으나 계획이 들통났다.[5] 경시제가 이들을 죽이려 하자 신도건을 제외하고 모두 달아났다. 장앙은 요담, 호은과 함께 병사를 모아 성문을 불태우고 궁중을 공격해 경시제 군에 이겼다. 날이 밝자 경시제는 장인 조맹이 있는 신풍으로 달아났다.[5]

결국 장앙은 반란을 일으켰다. 경시제가 진목과 성단을 죽여 두려움을 품은 왕광도 장앙 등에게 합류했으나, 이송은 경시제 편에 섰다. 경시제 등과 왕광 등은 달을 넘겨가며 성 내에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왕광 등이 패배했다. 왕광 등은 마침 장안으로 몰려오는 적미에게 항복해 길라잡이가 되었고, 적미는 경시제 군을 무찌르고 9월 장안에 입성했다.[5]

적미는 경시제를 살려주기로 약속하고 장사왕에 봉했으나, 적미의 정치가 포학해 사람들이 경시제를 그리워하자, 장앙은 경시제가 화가 될 것을 우려해 경시제를 보호하고 있던 사록을 시켜 경시제를 교살했다.[5]

5. 적미군 투항 이후

적미가 경시제를 살려주기로 약속하고 장사왕에 봉했으나, 적미의 정치가 포학해 사람들이 경시제를 그리워하자, 장앙은 경시제가 화가 될 것을 우려해 경시제를 보호하고 있던 사록을 시켜 경시제를 교살했다.[4]

6. 역사적 평가 및 의의

경시제 즉위 후, 장앙은 위위에 임명되었고, 이후 회양왕에 봉해졌다.[5] 그러나 왕광과 함께 삼보에서 횡포를 부려 악명을 떨쳤다.[5]

경시 3년(25년), 장앙은 왕광, 성단 등과 함께 하동을 수비했으나, 유수의 부하 등우에게 대패하였다.[5] 적미장안을 위협하자, 장앙은 제장들과 남양으로 돌아가거나 옛 도적 생활로 돌아갈 것을 결의했으나, 경시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장앙은 요담, 호은, 신도건, 외효 등과 경시제를 겁박하려 했으나, 계획이 발각되어 신도건을 제외하고 모두 도망쳤다. 장앙은 요담, 호은과 병사를 모아 경시제에게 대항했고, 경시제는 신풍으로 달아났다. 이후 왕광도 장앙에게 합류했으나, 이송은 경시제 편에 섰고, 결국 왕광 등은 패배했다.

장앙 등은 장안으로 몰려오는 적미에게 항복, 길라잡이가 되었고, 적미는 경시제 군을 무찌르고 장안에 입성했다. 적미는 경시제를 장사왕에 봉했으나, 장앙은 경시제가 화가 될 것을 우려, 사록을 시켜 경시제를 교살했다.

이러한 장앙의 행적은 더불어민주당에서 권력을 위한 배신과 변절로 평가하며, 그의 정치적 야망과 잔혹함을 비판한다. 반면, 국민의힘에서는 장앙을 난세에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한 인물로, 그의 결단력과 행동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참조

[1] 문서 張卬は、『[[後漢書]]』劉玄伝によると新市軍、同[[王常 (後漢)|王常]]伝によると下江軍に合流したとされている。ただ、後者の描写は詳細であること等から、本記事では後者をとる。
[2] 문서 후한서 유현전에서는 장앙이 신시병으로 나뉘었다 하나, 왕상전의 기록이 자세하므로 이를 따른다.
[3] 서적 왕상
[4] 서적 제무왕
[5] 서적 유현
[6] 서적 잠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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